밤 열한시 - 황경신

 

 

1.

우리의 시간은

 

꽃을

따는

마음이

아니라

나무를

심는

마음이었으면

 

우리의

시간은

 

 

2.

기억하라, 기억하라,오 세상이여,

솔직하고 정직한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_ 셰익스피어,[오셀로]

 

 

3.

그저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있는게 없어도

견디다보면 기다리는 게 오기도 한다는 걸 알려준 여름

이걸 또 까맣게 잊을 때 쯤 겨울의 끝도 오겠지

믿음을 그리 쉬 부시지 말라고

 

 

4.

밤 열한시

 

참 좋은 시간이야

오늘 해야 할 일들을 할 만큼 했으니

마음을 좀 놓아볼까 하는 시간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못했으니

밤을 새워볼까도 하는 시간

 

밤 열한 시

어떻게 해야 하나

종일 뒤척이던 생각들을

차곡차곡 접어 서랍속에 넣어도 괜찮은 시간

이럴가 저럴까 망설이던 마음도

한쪽으로 밀쳐두고

밤 속으로 숨어 들어갈 수 있는 시간

 

밤 열한시

그래, 그 말은 하지 않길 잘했어,라거나

그래, 그 전화는 걸지 않길 잘했어, 라면서

 

 

5. 슬프지만 다 좋은

고마운 마음은 늘 고맙다는 말보다 커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이 된다

사랑의 정의는 몰라도

이것이 행복의 증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6. 힘을 빼고

 

내가 너를 지배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네가 나를 판단하거나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밀거나 당기며 서로의 감정의 무게를 재보지 않고 흘러가는 일,

길어지고 깊어질 수록 단단해지는 것이 인연이라 믿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깊어질 수록 부드러워지고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것.

그런 인연이라면 영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7. 기억

기억을 잃어버리면, 가난해진다. 가난해지면, 쓸쓸해진다.

+

사랑때문에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모조리 기억할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랑에 빠진 적이 없는 것입니다.

_셰익스피어, 당신이 좋으실대로

 

8.

무엇이나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나는 것이므로 모든 감정을 최선을 다해 소진하기로 한다

 

9.

이렇게 험한 날 속에서 그대를 만나 아름다운 에너지를 얻었다.

돌아오는 길의 동그란 달이 동그랗게 동그라미를 그리니

잘자요 오늘 밤은

 

10.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서로에게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졌어도, 여전히 상대의 예민함을 세심하게 살펴 한 걸음 가까이 가고 한 걸음 뒤에 있을 때를 가리는 그런 관계가 나는 좋은 것이다.

 

11.

가야 할 한가지 이유가 가지 말아야 할 백가지 이유에 선행한다. 인생은 그런 힘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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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와

전자책들을 살피다가

읽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적어내어낼 수 있는 용기와 재주를 가진 건

축복인 것 같다

 

부산에서 태어난

영문학도라는 저자에게

왠지 모를

좋은 동질감을 느끼며

읽다가

마음이 동했던

몇몇 구절들을 옮겨 적었다.